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산나비와 노량, 뻔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
    문화이야기 2024. 1. 6. 14:55

    ※두 작품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품을 감상하지 않은 분들은 반드시 먼저 작품을 감상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최근 인터넷 방송계를 뜨겁게 달군 게임이 있다. 원더포션에서 개발한 [산나비]라는 게임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계 역시, [서울의 봄]을 이어 흥행 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김한민 감독의 [노량:죽음의 바다]가 그것이다.

     이 두 작품을 감상하며, 나는 두 작품 간의 큰 공통점을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작품은 굉장히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빠와 아들딸, 지겨운 신파 클리셰 

    △산나비를 시작하면 볼 수 있는 장면, 애교 많은 귀여운 딸은 곧 폭사한다.

     

     산나비는 하나의 창작물로서 매우 잘 만든 작품이다. 비록 그 스토리가 다른 신파극에 비해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산나비의 기본 테마는 '부성애'로 시작한다. 이 부성애는 나중에 '가족애'로 변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작품들의 결말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 희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산나비는 이 공식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산나비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소위 '사망 플래그'를 꽂고, 작중 등장인물인 '금마리'의 입을 빌어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망 플래그임을 지속적으로 노출한다. 

     

    △셋째 이면이 죽는 악몽을 꾼 후, 첫째아들 이회와 술잔을 기울이려 하기 직전의 이순신

     

     노량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 이순신을 조명하기 위한 장치로 그의 가족애를 사용한다. 이것은 명량을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2014년작 명량에서도 최민식 분 이순신 역시 노량의 김윤석 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죽은 동료들의 환영을 보기 때문이다. 본작의 이순신 역시 아들의 죽음을 깊이 비통해하고, 그를 노야로서 존경하는 명장(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순신이 전쟁을 속행하고자 하는 까닭을 아들의 복수로 유추할 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등장한다.

     그리고 노량의 이순신의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두 작품을 본 나의 감상은 상반되었다. 

     

     정보의 은폐, 그리고 캐릭터 구축

    △로봇 군단과 주인공을 구별하지 못하는 금마리

     

      산나비는 처음에 플레이어에게 매우 명확한 동기를 제공한다. '딸의 복수'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플레이어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제삼자다. 주인공이 아무리 강한 복수심을 가졌다고 설명한들, 플레이어에게까지 그 복수심이 전가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나비는 이에 대해 매우 명쾌한 대답을 제시한다. 

     

     '이 귀여운 애기가 죽는다니까? 정말 화 안 낼 수 있어?"

     

     그렇다. 그냥 귀여운 캐릭터를 하나 던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작진은 영리하게도, 그 캐릭터를 설명하는 부분을 게임을 시작하는 플레이어라면 넘길 수 없는 튜토리얼에 심어 놓는다. 플레이어들은 튜토리얼 내내, 튜토리얼을 플레이하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조잘거리고, 통제할 수 없고, 이상한 걸 시키지만 아빠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귀여운 딸을 마주해야 한다.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동안 플레이어의 딸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지고, 종래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딸을 노심초사 걱정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체험하게까지 된다.

     

     그리고 제작진은 잔인하게도,

     여기서 딸을 폭사시켜 버린다.

     <산나비>라는 이름과 함께.

     

     이렇게 제작진은 플레이어에게 이 게임을 플레이할 동기를 부여한다. 플레이어들은 가장 먼저 복수심에 몸을 맡기고, 플레이어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작품을 진행하면서, 플레이어들은 노골적으로 깔린 이질감과 마주해야 한다. 인간이 완벽하게 사라진 도시, 인간은 추적하지 않지만 플레이어는 추적하는 레이저, 이따금씩 보이는 기억의 노이즈, 반복되는 딸의 "아빠!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라는 대사, 플레이어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력자, 플레이어를 "워커"라고 지칭하는 적 몬스터... 모든 내용이 플레이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지칭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여기까지 온 플레이어는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며 아마도 내 기억에 누군가 참견했을 것이란 걸, 또한 스토리적으로 나와 엮이는 이 꼬마 아가씨가 누구인지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숱한 사람들이 우는 것을 가식적으로 여겼다. 이미 나는 모든 스토리를 이해했고, 그것은 내가 특출난 추리력을 지녀서가 아니라 게임이 매우 노골적으로 이런 결말을 장치화해 놓았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주인공이 딸을 만나는 장면을 어떻게 진행할지 기대한 상태로 옛 동료들과의 재회를 마치고 딸을 찾아 나섰다.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주인공과 마리

     

     작품이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딸에게 숱한 상처를 준다. 그것은 주인공이 딸을 딸로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딸 금마리도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마리는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참으면 참을수록, 그녀의 눈앞에 있는 '워커'는 기억 속의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특히, 그녀가 힘들 때 불어 달라고 했던 하모니카에 대해서, 그녀가 사랑하던 반려묘 '머핀'에 대해서도, 워커는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워커는 그녀를 의심하고, 추궁했다. 언제나 믿고 의지해 왔던 아버지에게, 금마리는 작중 내내 배신당해 왔던 것이다.

     

     작품은 금마리의 사정에 스토리를 따로 할애하진 않았다. 대신 3부에서 작품의 최종 보스인 송 소령을 클리어하고 난 후, 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리의 나레이션을 들려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주인공과 마리의 여정을 모두 알고, 지금까지 일어난 일의 전말을 모두 안 시점에서 우리는 초반에 그렇게나 예뻐했던 귀여운 딸이, 주인공이 사라지고 난 후 겪었을 고초와 마음고생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딸이 내게 느꼈을 실망감과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치게 된다. 또한 위 대사를 보듯이,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지 고뇌하게 된다. 그렇게 둘의 감정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재회한 부녀.

     

     딸은, 그가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한다.

     

     이 엔딩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하는 내 눈에서는 저항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플레이어가 이 엔딩을 간절히 바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산나비는 이 장면 이후 아버지와 딸의 마지막 이별을 묘사한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정작 재회한 지는 얼마 되지 못한 두 사람은 가슴아픈 이별을 맞고야 만다. 

     

     산나비의 이야기는 클리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릴 적 이별한 아버지와 딸, 둘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대한 위기는 닥쳐온다. 거대한 위기에 직면한 아버지는 딸 대신 스스로가 희생하며, 딸은 눈물을 흘린다. 해운대, 7번 방의 선물, 타워 등 한국 영화에서 숱하게 봐 온 클리셰적인 신파극 그 자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작진 역시 그러한 한계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담하게 "그래서 안 울 수 있어? 감동 안 받을 수 있어?"라는 식으로 도발을 걸어 온다. 그러한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플랫포머 게임으로서 고심해서 개발한 재미있는 맵, 엄청나게 많은 대사 하나하나마다 강조점을 찍고, 대사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도록 고심해서 스크립트를 짰다.

     

     원래 게임 스크립트는 어느 정도 유치함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엄청나게 많은 대사량을 쓰기가 어려울 뿐더러, 인게임 플레이를 중시하는 플레이어들의 성향 때문에 쉽게 스킵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이다. 과장되고 유치하지만 직설적인 대사는 비록 사실적이지는 아닐지언정 캐릭터를 유저들에게 각인시키는 데에는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산나비는 그런 방법론을 쓰지 않는다. 산나비의 스토리는 오롯이 대사를 다 읽었을 때만 그 진가가 나온다. 그렇다고 플랫포머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와이어 액션을 접목한 맵은, IWBT 시리즈를 위시한 악명 높은 고전 플랫포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즐거운 경험을 선사해 준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게임을 플레이한다면 반드시 그 방대한 스크립트를 모두 읽어 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언젠가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도 재미있을 듯하다.

     

     가격 역시 고작 영화 한 편 밖에 안 되는 만 오천원이다. 내 소회로는 2만 5천원에 팔아도 제값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사람은 가성비를 따지게 되어 있으니 지금만큼의 감동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간에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선택과 집중, 그러나...

    △캐릭터 외형과 연기만큼은 정말 멋있었던 정재영 배우의 진린

     

     

     이번에는 다시 노량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개인적으로 노량을 볼 때의 관전 포인트는 한산과 비슷했다. "전 국민이 엔딩을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

     아쉽게도, 김한민 감독은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건 포기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피했다고 보는 편이 편할 것이다.

     

     본작의 이순신은, 칼의 노래 이후 모든 이순신이 그랬듯 '성웅'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조명한다. 하지만 노량의 이순신은 명량의 이순신과는 분명 다른 입지에 있다. 명량에서의 이순신은 압도적인 약자의 위치였다. 그 스스로도 모진 고신을 받아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으며, 칠천량의 참패로 부대는 와해 상태에 본국에서도 육군으로의 편입을 종용하는 상태였다. 그것만으로 모자라서 적군은 330척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휘하 제장들과 병사들의 사기 역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순신 스스로도 승리를 완벽히 점치지는 못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최민식 배우의 열연에 힘입어 PTSD에 시달리는 성웅의 인간적인 일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와중에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전략적 식견과 군사적 움직임은 조금 떨어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노량의 이순신은 적과 최소한 대등한 위치에 있다. 그의 주변에는 우군인 명군이 버티고 서 있으며, 왜군은 퇴각하려 하는 위치에 있다. 명량 때처럼 자연스럽게 이순신의 고뇌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이런 부분을 거의 전부 버려버린다.

     

    △왜 비중있게 다뤄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준사

     

     작품의 주연은 총 네 명이다. 이순신, 명 총사령관 진린, 명 부사령관 등자룡, 그리고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 이 중 빌런인 시마즈를 제외한 주연급 인물 3명은 그 인물상의 구축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먼저 진린이다. 이 인물은 이제껏 나온 이순신 관련 창작물에 비해서는 훨씬 더 실제 역사에 근접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진린은 이순신을 인간적으로 존경하여 '노야'라는, 우리말로 바꾸면 '어르신'과 같은 존칭으로 일관했다고 하며, 이순신에게 조선은 장군에게 너무 작으니 함께 명으로 가자고 부탁할 정도로 이순신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작중의 진린은 이러한 모습을 반영하듯이, 이순신을 노야라고 존칭하며 그가 무례한 모습을 보여도 대부분 넘어가는 대인배적인 모습도 이것저것 보여준다.

     

     하지만 작품은 이 진린이라는 인물이 이제껏 이순신 관련 창작물에서 맡던 역할, 즉 이순신에게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서브 빌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린은 작중에서 지속적으로 "적은 후퇴할 것이고 전쟁은 끝났는데 왜 노야께서는 싸우려 하시는가? 그것은 사적인 복수가 아닌가? 사적인 복수로 병사들을 사지로 보내는 것은 옳은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이순신이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조명연합을 포기해서라도 출병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출병하며 왜군이 약속을 어기는 순간이 와서야 싸우려 든다. 심지어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명군이 출격하는 그 순간 왜장의 입으로 "진린 따위로는 안 될 텐데?"라는 비웃음까지 받는다. 심지어는 왜장에 의해 목숨이 위험해지는 입장에까지 처하게 된다. 작중 내내 이순신의 말보다 왜군의 말을 더 신뢰하는 졸장으로 묘사되는데, 배우의 연기와 차후의 무력에서 그 카리스마를 뽐내는 역할임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아쉬운 캐릭터 활용이 아닐 수가 없다.

     

     사실 이런 캐릭터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순신의 서사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서사 역시 날림 처리된다. 본작의 이순신은 명량의 이순신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래서인지 작은 이순신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또한 본작의 이순신은 지속적으로 먼저 죽어간 전우들을 추억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성웅의 인간적인 편린을 지켜볼 수 있다. 거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이순신의 전의는 이런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이순신은 왜 싸우는가? 진린의 말처럼 복수심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순신은 어떤 이유로 싸우는가? 유추할 수 있는 정답은 이것이다. "지금 적을 보낸다면 적은 그 세를 불려 다시 침공할 것이다. 그 씨앗을 뿌리뽑음과 동시에 죽은 전우들의 혼을 위로할 것이다."

     굉장히 쉽고 상투적인 답변이다. 작품은 그 상투적임을 경계한 듯, 이순신의 입으로는 절대 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관람객들은 이순신의 의중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들이 죽는 꿈을 꾸고, 준사를 아들로 여기는 듯한 언동을 보이고, 명부까지 태워 가며 죽은 전우들을 생각하고, 최후에까지 전우들의 환영을 보면서... 전쟁하는 목적은 그게 아니라고? 그럼 무엇이 이순신의 목표인가? 진린의 말처럼 사사로운 복수가 아닌가?

     

     작품이 이렇게 두 주인공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자, 관람객들도 두 주인공에 이입할 수가 없어진다. 그리고 나는 작품이 명장들을 다루는 방식이 참 아쉽다고 느껴진다. 진린이 이순신에게 대립하는 이유만 주어졌더라도, 진린의 행동과 이순신의 행동이 동시에 이해된다. 쓸데없이 이순신의 아들을 죽인 왜군들을 심문할 시간에, 향수병에 걸린 명 병사들을 진린이 다독이는 장면 하나만 넣어 주기만 했어도 해결되는 문제다. 이 장면이 삽입되며 무언가를 느끼는 진린을 보여주기만 해도, 그 이후 진린의 모든 행동 원리가 다 이해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순신 역시 그의 대의가 무엇인지 말해 주었어야 했다. 돌아갈 곳이 있는 병사들을 지키고 싶어하는 외국의 장수와, 난의 재발을 막고 국토를 유린한 적에게 복수하고 싶은 우리나라의 장수.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인간 이순신'에 집착하여 외려 성웅을 인간으로 끌어내려 버린다.

     

    △명 부사령관 등자룡

     

     그나마 진린은 이해라도 되지만, 등자룡은 가관이다. 이 인물은 왜 이렇게까지 왜군 참살에 진심인지 알 도리가 없다. 이순신에게 맹목적이다시피 충성하는데 막상 이순신한테 받은 거라고는 판옥선 한 척밖에 없다. 노린 건 '답답한 총사령관 밑에 말이 통하는 부장' 정도의 포지션인 것 같은데, 막상 이 인물의 행보가 훨씬 더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전쟁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냥 호감가는 다른 나라 노장 정도의 입장인데, 전쟁이 시작하면 적군이 따로 없다. 총사령관이 진격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돌진해서 왜군과의 전투를 벌인다. 이런 행패를 벌인 장군이 감독의 전작에도 있다. 바로 [한산]에서의 원균이다. 그러니까 전작에서는 우리 편이어서 그야말로 짜증 그 자체였던 인물을 본작에서는 호감형인 인물로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면 모르겠다. 이순신이 인간적으로 그를 감복시킨 적이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작중에서는 그런 내용을 신경쓸 시간에 이순신이 악몽을 한 번 더 꾼다. 결국 이 인물은 사령관 말도 안 듣고 돌격하다가, 적장에게 단칼에 목이 베이고 만다. 배우의 연기로 포스 있게 등장했을 뿐이지 이만한 졸장이 따로 없는 것이다.

     

     비슷한 캐릭터가 하나 더 있다. 한산에서도 비중 있게 등장했던 항왜 준사다. 그런데 준사는 막말로 영화에서 전부 걷어내고 진린 구하기만 시켜도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실제 역사에서는 1634년까지 생존했던 인물을 왜 굳이 꺼내가지고 죽여야 했는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다. 그나마 준사가 나와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순신이 준사를 죽은 아들 이면에게 투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면에 관한 악몽을 꾸고 나서 준사에게 돌아갈 곳을 마련하려고 한다거나, 반드시 살아 와야 한다고 명하는 것까지. 이순신이 준사에게 주는 애정은 단순 제장에 대한 그것이라기엔 무겁다.

     

     막상 그래 놓고 최후의 회상에는 등장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필자가 꼽는 노량 최고의 캐릭터,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 분)

     

     이렇게 주인공 측의 캐릭터들이 처참하게 박살나고 있을 때, 고고하게 빛나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 바로 백윤식 분의 시마즈 요시히로이다. 본작이 연기로는 누구도 까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백윤식 배우의 절륜한 연기가 타 주연들에 비해 군계일학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시마즈라는 캐릭터가 더욱 빛난다고 본다.

     

     본작의 시마즈는 등장하자마자 고니시를 구원하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부터 시사한다. 이 인물이 왜장임에도 불구하고, 명분과 이해득실을 따질 줄 아는 영민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니시의 설득에 출병을 결심하고, 적장으로 돌아설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인물은 말 그대로 명량 3부작 최악의 적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명량의 구루지마는 용장이라고 불렸지만 별다른 전술도 없이 그대로 깨지기만 했고, 이순신에게 단칼에 참해진다. 한산의 와키자카는,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해적과도 같은 기동전을 보여줬으나 결국 이순신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고 처참하게 학살당한다. 그러나 시마지는 선봉대를 버리는 날카로운 판단, 냉정한 전장 지휘를 통해 이순신의 선봉대에게 타격을 입히기까지 한다. 또한 이순신이 지휘하지 않는 명군의 돌격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응전하여 부사령관 등자룡의 목을 베고, 총사령관 진린의 목숨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그 개인의 무력 역시도 만만치 않은지, 노장임에도 왜병 둘을 언월도로 들어서 내던져버린(!) 등자룡을 단칼에 죽이는가 하면, 조선군과 항왜들을 도륙내기도 하고, 진린을 노릴 때는 친히 참전하여 그를 위기로 몰아간다.

     

     그러나 시마즈는 이순신의 기만책을 알아챌 정도로 조선의 바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고, 결국 관음포에서 포위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병사들을 독려하여 사기를 끌어올리고, 이순신이 함대의 허리를 끊어버렸을 때도 침착하게 응전하여 결국 총사령관 이순신을 사살하는 데까지 이른다.

     

     만약 이 인물이 이토록 고결한 적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작품의 클라이막스인 이순신이 북 치는 장면을 결코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이순신이 작품 중에서 고작 적군 하나를 베고 갑자기 아군의 환영을 볼 때 어이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입 밖에 낸 "싸우는 중에 어그로 끌지 말라고!"라는 말에, 옆에 있던 친구도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물론 작중에서 이순신이 대놓고 "정 만호!"라고 외치긴 했으나, 딱히 3부작 중에 부각되지도 않은 인물인데다 화면에서는 왜적과 싸우고 있었기에 그가 망자일 거라는 생각까지 바로 생각이 닿진 못했다. 이 회상이 끝난 후 북 치기 시작하는 이순신을 향한 부하 장수와 진린의 대사는 가히 이 작품의 최고 명대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장군께서 우리를 격려하신다!"

     "어째서 북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냐?"

     

     수전 묘사가 시작된 후 얼마 후부터 이순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백병전이 일어났을 때 오히려 진린보다도 싸움에 임하지 않던 이순신이 갑자기 북채를 잡더니 아군의 사기가 확 올라가는 것이다. 이게 총지휘관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짓임을 차치하더라도, 본작은 이순신을 소위 '서포터'로 만들어 버렸다. 이순신의 승리를 그의 지략과 분전이 아니라 북소리로 만드는 아주 웃긴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웃긴 장면으로 만들지 않은 가장 큰 공을 나는 시마즈에게 돌리고 싶다. 북소리 버프(?)에 힘입은 조명 연합군에게 왜군이 패퇴하기 시작할 때, 시마즈는 본인의 모든 전술과 무력이 결국 통하지 않고, 구원하러 오지 않는 고니시에게 절망한다. 그때에도 이순신의 북소리는 멈추지 않고 시마즈를 괴롭힌다. 결국 그는 무릎을 꿇고 구토까지 하며 "저 북 소리를 멈춰 달라"고 절규한다. 시마즈는 실제로도 노망날 때까지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인 만큼, 이순신의 목표였던 '완전한 승리'를 보여주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시마즈의 절망을 통해 일본의 완전한 패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노량에서 가장 매력적이었으며, 또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된 캐릭터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노량은 졸작인가?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에 쓴 돈이 아깝지 않은 전투 씬들

     

     

     이번 글에서 호평일색이었던 산나비에 비해, 혹평 일색인 노량에 의구심을 가진 독자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글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뻔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이라 어쩔 수 없이 캐릭터를 비교하게 된 것뿐이었다.

     

     노량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서사를 줄이고 해전 씬에 시간을 쓴 작품이다. 따라서 작품이 시작하고 상기한 촌극만 좀 버티고 나면, 작품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전투 신은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보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 준다. 감독은 진법을 통한 해전과 두 장군의 지략 싸움, 그리고 엄청난 스케일의 해상 백병전을 통해 관람객들을 충족시켜 준다. 특히 백병전의 경우 그 연출이 꽤나 눈에 띈다.

     

     원래 백병전은 한 자리에서 오래 싸우면 단조로워진다. 더구나 그것이 주인공급의 일대일 일기토가 아니라 여러 엑스트라들의 싸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해상 백병전은 특성상 아무리 싸움터를 바꿔도 결국 똑같이 생긴 배 위에서 진행된다. 감독은 이 부분을 명군 - 조선 장수 - 왜군으로 이어지는 인칭의 변화로 훌륭하게 표현한다. 이 장면에서 관람객은 각 나라의 병사들의 입장에 하나씩 이입하며, 그들의 절박함과 전장의 급박함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노량은 캐릭터 대신 전투에 모든 것을 건 작품이라 감히 평해 본다.

     

     마치며

     

     뻔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지만 사실 뻔한 이야기는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중 최근에 본 감명 깊은 작품들을 가지고 왔다.

     모든 작품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량에서 만난 아쉬움들도, 그것이 감독의 최선이었다고 감히 이해해 볼 수 있다. 김한민 감독은 이번 삼부작을 통하며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노량은 비록 한산과 함께 내 기준에서는 아쉬운 작품의 일각이나, 김 감독의 차기작에서 그가 얼마나 발전된 모습으로 돌아올지는 기대하기에는 충분한 작품이었다.

     원더포션과 김한민 감독의 향후 행보를 응원하며, 이만 줄인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