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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안슬기 저] - 악마는 무엇이 만드는가(결말포함)독후감 2023. 1. 2. 19:56
"악마가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가?"
이 책의 악마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죄'에 집중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죄에 대해 얼마나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책의 초반에 작중 주인공 '석규'는 사고를 발견하고 악마로 각성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일일 수도 있으리라. 이 시퀀스는 석규가 누구인지를 인지하는 과정이다. 그는 아주 평범한 가장이다. 보험사에 다니는 영업사원이며, 제대로 실적을 내지 못해 팀장에게 말 그대로 '조인트를 까이고', 집에서는 아내 지수의 바가지와 아들 훈의 무관심에 고통받는다. 보험회사라는 설정답게 그는 이미 가족들에게서도 버림받은 지 오래다. 세상 모든 것은 석규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석규는 스스로의 패배감에 몸부림친다. 그가 사고에서 운전수의 '복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운전사의 복수를 본 석규는 스스로의 변화를 마주한다. 그것은 악마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악독해지기로 결심했다. 준강간 수준으로 그를 괴롭혔던 군대 선임을 찾아가 협박하며, 여타의 폭력적인 방법들 역시 문제없이 사용하며 회사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차지하는 수준까지 이어진다. 반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던 선임 팀장은 회사에서 도태되어 자영업을 창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석규에게 사소한 복수인지 보험 계약까지 강요당하게 되는 것까지 포함된다.
작은 악마가 된 석규를 굉장히 불쾌하게 묘사한다. 그가 악마임을 인정한 직후 한 일은 길거리에 있는 노숙자를 폭행하는 일이다. 물론 노숙자가 악인이라는 묘사는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륜녀의 증언일 뿐이다. 석규는 일 때문이지만 이미 가정을 버리고 불륜을 저질렀으며, 노숙자라는 또다른 약자에게 거리낌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악인이다.
그러나 본작은 석규가 악마임을 끝의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석규의 폭행은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노숙자 광호에 대한 폭행을 제외하면 모든 것들이 악인을 대상으로 자행된다. 석규에게 악마란 본인의 선함을 인정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는 매일 거울을 보며, 그 뿔과 날개를 보며 스스로가 악마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석규의 주변 인물들은 더더욱 그 가정을 확실시한다.
석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작중 묘사를 보면 참으로 남성에게 인기가 많다.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성기를 갖다 문지른 군대 선임 종진과, 그를 폭행하고, 희롱하고, 종래에는 강아지 취급하며 그 앞에서 자위행위를 종용하거나 "빨라면 빨아야지 개새끼야"를 연호하는 민혁이 그렇다. 어디 아내뿐인가. 회사 후배 승기는 회사를 배신하는 수준이며, 팀원들은 그나마 정상이라지만 폭행을 적극적으로 비호하는 등 문제 있는 사람들이다. 이사 역시 그에게 절대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다. 전 여자친구인 현주 정도를 제외하면(사실 이쪽도 그다지 정상은 아니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비중있는 인물들은 다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비꼬았지만, 사실상 석규의 인생은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 씨가 보여주는 주변인물상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처음에 만들었던 인물상과 다르게, 석규는 절대로 보편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은 석규가 스스로를 악마라 말하는 것과 다르게 그가 여전히 한 명의 가장임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그러면서 권선징악적 요소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석규는 그 자신의 악행으로 파멸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석규는 소시민적인 모습을 잃지 않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악마여야 했다.
기실, 석규의 모습이 아무리 악마답다 해도 그는 끝의 끝까지 자신의 숙적과도 같은 민혁과의 우격다짐에서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며, 그를 몇 번 압도했을지언정 그 아들 훈이 민혁의 아들 소라를 불구로 만들어버린 이후에는 계속해서 민혁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을 포기한 악마라면 과연 훈의 악행에 대해 미안해해야 했을까? 아니, 아버지로서 고뇌해야 했을까? 그럴 리 없었다. 작은 석규의 악행을 아버지의 삐뚤어진 노력 정도로 바꿔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초반의 설정과도 상충되는 면이 있다. 석규는 분명히 운전수의 복수를 보고 본인도 변하게 된 것이다.
책임 소재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 만약 민혁이 석규를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석규는 민혁이 또 민혁의 아내 경숙이 보는 앞에서 소라를 겁줬을까? 경숙이 소라에게 바람을 넣지 않았다면 훈이가 과연 소라를 폭행했을까? 석규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지만, 가해자가 된 후에도 피해자의 포지션을 유지한다. 그리고 결국 소라의 병원 문제에서는 대출까지 끼면서 해결에 몰두한다. 진짜 악마라면, 소라를 죽이지 않았을까? 소라를 넘어서 민혁 가족을 죽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에 준하는 범죄를 통해 입을 막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민혁의 폭행에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한 적도 없다. 물론 완력에서 상대가 안 될 수도 있었겠지만 작중 묘사되는 민혁은 <나쁜 녀석들>의 박웅철보다는 <베테랑>의 조태오에 가깝다. 조태오 역시 싸움을 잘 한다는 묘사는 있었지만, 각 잡고 흉기를 들고 설치는 상대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석규가 흉기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씨 좋은 인물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미 후배 '승기'를 상대로 얼굴에 상해를 입힌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민혁을 상대할 때면 나약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그를 자꾸 인간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결국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아내 지수가 불륜에 모자라 아들 훈을 데리고 이혼을 선언하면서 작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나는 솔직하게 석규가 못해도 불륜 상대인 선배 용준 정도는 죽이길 바랐다. 그래서 그가 완전하게 인간을 버리고 악마로서 각성하기를 바랐다. 석규에게 닥친 불행은 그를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석규는 끝까지 그러지 못한다. 그는 인간으로 남는다. 그는 깡패와도 비슷한 일들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평균적인 인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딱 한 번 그가 진정한 악마로서 각성하는 장면은 권 이사와 승기를 죽일 때뿐인데, 그나마도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악마임을 포기하고 만다. 선을 넘었으니 그는 죗값을 치를 것이다. 그가 사는 세상은 그게 옳다.
작중 스스로를 악마로 인정한 인물은 주인공 석규뿐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소시민 도베르만 팀장도, 아내 지수도, 선임 종진도, 숙적 민혁과 민혁의 아내 경숙도, 아들 훈도, 선배 용준도 모두 악마다. 작품의 캐치프레이즈와 다르게 석규를 악마로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 스스로이다. 그러나 그는 악마 소굴에 살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악마로 만들었다. 마지막에 석규의 아들 훈이 그 아버지에게 악마는 사라지라고 표효할 때 나는 그가 그토록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고작 소문 따위에, 고작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 정도에,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친구를 생사의 경계를 오가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인가? 본인도 싫어하는(물론 자격지심이지만) 아버지 욕설 한 번에 참지 못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사람은 누구인가? 그래서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석규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건 대체 누구인가? 석규를 옹호할 생각은 없으나, 훈의 폭력이 아니었다면 석규는 여전히 그의 아버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훈은 스스로의 잘못조차도 인정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작품 최고의 악마는 누구인가? 죄질로 따지자면 사람을 죽인 석규, 죽기 직전까지 보낸 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폭력을 자행한 민혁은 동일선상에 있다. 그런데 어째서 훈은 석규를 일갈하는가? 어째서 그만을 죄인으로 만드는가?
작품의 결말은 그래서 굉장히 찝찝한 결론을 내린다. 악마를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주변 사람들이, 사회가, 혹은 개인의 무력감이 악마를 만드는가?
아니.
악마는 악마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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